"다녀왔습니다."
민지가 지혜의 노트를 들고 도망치고 있을 때, 같은 시각 아무것도 모르는 소민은 방과후 동아리도 거르고 집에 도착했다.
요즘따라 몸이 무겁게 느껴져 동아리 활동을 해도 몸이 잘 따라와주지 않았다. 갑갑했지만 피곤한 탓이라고 생각하곤 오늘은 집에서 일찍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와 언니!"
"왔어 소민아?"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언니인 한수정과 동생인 한세희가 소민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싱글벙글 웃으며 마중나온 것이다.
소민은 몹시 불쾌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왜 친한척이야? 진짜 역겨워 죽겠으니까 늘 하던대로 방에 들어가 제발."
소민의 눈에는 잔뜩 뚱뚱한 두 덩어리가 히죽거리니 역겹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원래라면 자신 눈치를 보느냐 피해다녀야 할 돼지들이 왜 갑자기 친한척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모욕적인 말들을 해 알아서 침울해져 피하도록 만들기 위해 소민은 험한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두 사람은 그런 소민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언니."
"맞아 소민아 자꾸 화내면 예쁜 얼굴 망가진다구?"
'뭐지..?'
능글맞게 웃는 두 사람을 보며 소민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가뜩이나 최근에 이상한 일에 휘말려 스트레스인데 집에서 까지 가만두질 않으니 두통까지 밀려 올 지경이였다.
"아니 씨발 그러니까..!"
결국 소민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욕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꿀꿀?"
수정은 뜬금없이 소민을 보며 돼지 울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소민은 그런 수정을 보고 꼴에 어울리는 짓을 한다고 일갈하려고 했다.
그리고 소민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소민은 덜컥 의식을 잃으며 텅빈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멍하게 있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시킬 때 마다 느끼지만 효과 좋다니까~"
"맞아맞아."
꿀꿀은 지혜가 수정에게 알려준 소민의 컨트롤 키워드였다. 이 키워드를 수정이나 세희가 말하게 된다면 소민은 즉시 두 사람의 말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지? 그 사람이?"
"응,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모든지 말해도 된댔어. 일단 우리 마음대로 해보래!"
처음엔 지혜를 믿지 않았던 세희도 소민의 모습을 보곤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수정은 지혜가 약속했던 조건들을 말해주며 세희와 함께 소민을 안으로 잡아 끌더니 해맑게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으..응.."
소민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작게 신음을 내었다.
"내가 뭘 하고 있던거지..?"
집에 막 들어왔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문제는 거기서 기억이 멈췄다는 것이였다.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뜬 소민의 눈 앞에는 많은 양의 포장음식들이 놓여져 있었다.
"이게.. 뭐야?"
당황한 소민은 눈으로 식탁에 놓여진 음식들을 훑기 시작했다.
햄버거, 피자, 부대찌개, 컵라면 등등 평소 소민이 절대 입에 대지 않았던 살찌는 음식들이 잔뜩 식탁에 놓여져 있었다.
"킁킁.. 흣..!"
그 와중에 맛있는 냄새가 소민의 코를 자극하자 자신도 모르게 숨을 토해내며 소민은 당황했다. 원래라면 이런 것들을 맛있다고 느낄 리 없겠지만 지혜로 인해 맛을 알아버린 소민은 군침이 돌면서 배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꾸르르르륵..'
"안돼. 제발."
미각개조로 인해 건강식을 역겹다고 느끼는 소민은 하루 종일 토할 것 같은 걸 억지로 참고 먹느냐고 많이 먹지 못해 배고픈 상태였다.
그 와중에 이렇게 식욕을 자극당하니 소민은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웠다.
"야 한세희! 한수정!"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당연히 두 사람 밖에 없다고 생각한 소민은 언니임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껏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각자 방에 있던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오며 말했다.
"불렀어 언니? 무슨 일이야?"
세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묻자 화가 난 소민이 식탁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게 다 뭐야! 당장 안치워!?"
자신을 놀리려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해 소리쳤지만 세희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오히려 옆에 있던 수정이 짜증난다는 듯 소민을 보며 말했다.
"니가 먹겠다고 시켜놓고 왜 우리한테 성질이야.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해야지. 니가 왕이야?!"
"뭐?"
'이걸 내가 시켰다고?'
수정의 말을 듣고도 소민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불현듯 머리 속에서 자신이 이 음식들을 주문했다는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뭐야 이 기억..?'
"네 여기 OO동 OO아파트 OO호인데요, 여기 햄버거 세트 두개하구요.."
"네 여기 OO동 OO아파트 OO호인데요, 짜장면 되죠?"
"네 여기 OO동 OO아파트 OO호인데요, 혹시 피자 세트 할인 쿠폰 쓸 수 있나요?"
이 모든 음식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였다.
마치 퍼즐 조각들 처럼 자신이 주문했다는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하나 둘 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어..어?"
생전 한번 해본 적 없는 주문을 너무나도 능숙하게, 소민은 이 모든 음식을 직접 시키고 받아서 세팅까지 했던 것이다.
"야 한소민! 말 좀 해봐! 니가 시켜놓고 뭐 우리보고 쳐먹어라 이거야? 니가 진짜 그러고도 사람이야?!"
수정은 정말 화났는지 분노가 가득찬 목소리로 소민에게 따졌다.
자신이 시켰다는 기억이 또렷해진 소민은 그런 수정에게 반박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더니 소리쳤다.
"아 미안해! 내가 다 먹으면 될거아냐! 내가 알아서 먹고 치운다고!"
소민은 지혜에게 기억이 지워져 살찌기 쉬워진 자신의 몸에 관련된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지혜의 암시 탓에 소민은 휴대폰을 꺼내 식탁위의 음식들을 사진찍기 시작하며 생각했다.
'할 수 있어. 까짓거 먹으면 될거아냐!'
이것을 먹으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소민은 수정에게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오기로 제일 앞에 있는 컵라면부터 열더니 후루룩 입에 쑤셔넣기 시작했다.
"..헉"
컵라면을 입에 넣자마자 몸이 굳어버린 소민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생각했다.
지극히 짜고 맵고 자극적인 맛.. 이것은..
'맛있어! 이거 뭐야?!'
여태까지 역겨운 음식만 먹어왔던 소민은 컵라면을 먹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충격을 받았다.
뇌를 훑는 듯한 쾌락이 소민의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수정과 세희는 그 모습을 보며 소민이 눈치채지 못하는 위치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무슨 맛일까?'
그간 뚱뚱한 가족에 대한 혐오감 하나로 수도승 같은 삶을 살아온 소민이였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항목 인 먹는 것으로 고문 받은 탓에 무너지고 있던 정신은 너무나도 쉽게 소민의 그동안의 의지를 붕괴시켰다.
소민은 눈이 동그래져 손에 닿는대로 입에 넣어보며 맛을 즐기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몹시 달고 짜고 자극적인 맛이였다.
"꺼윽.."
작게 트름하며 소민은 뒤로 뻗어버렸다.
그동안 소식했던 탓에 다른 사람이 보기엔 여전히 적게 먹은 느낌이지만 소민 입장에선 이미 평소보다 오버해서 먹은 상태였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코는 이미 돼지코가 되어 벌렁거림이 멈추지 않았고 뜨거운 것을 먹으며 흘린 땀 탓에 겨드랑이에서는 톡 쏘는 악취가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세희와 수정은 돼지코가 된 소민의 얼굴을 보며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처음엔 살짝 충격이였지만 아마 저것 역시 지혜라는 사람이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수정은 의자에 퍼진 소민을 보며 말했다.
"야 저 음식들 안보여? 아직 한참 남았잖아."
수정의 말에 소민은 수정이 가리킨 식탁 위의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수정의 말대로 많은 양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꺼윽, 더, 더는 못 먹어."
소민은 힘겹게 말하며 식탁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세희가 소민의 몸을 다시 식탁에 앉도록 누르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언니, 후후 많이 먹어."
"맞아 소민아 더 먹을 수 있지? 응?"
수정은 히죽 웃더니 음식을 한 숟가락 떠서 소민의 입으로 가져갔다. 소민은 그런 수정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미쳤어? 더 못 먹는다니까!"
'꾸르르륵'
이미 한계치까지 먹은 배는 복통을 호소하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자 수정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꿀꿀 우리 소민이 착하지? 이거 다 먹을 때 까지 말 듣자?"
"아.."
수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민은 멍한 눈으로 저항을 포기하고 수정이 입으로 넣어주는 음식을 꿀떡꿀떡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희와 수정은 억지로 소민에게 거의 8인분에 가까운 음식을 입으로 쑤셔넣었고 소민이 정말 한계치까지 먹은 다음에야 남은 음식들을 자신들이 먹으며 향후 소민을 어떻게 망칠지 방향을 정하기 시작했다.
"돼지코 보니까 역시 그게 좋겠지?"
"응, 우리보다 더한 년으로 만들어버리자."
두 사람이 하하호호 할 동안 소민은 조금만 움직여도 입으로 역류하기 직전의 상태로 부들부들 떨며 식탁에 앉아있었다.
"사람을 마음대로 바꾸는 노트라.."
민지의 설명을 전부 들은 지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지는 지민이 전혀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으로 너무 진지하게 들어주자 당황하며 말했다.
"이걸 믿어요? 내가 거짓말 하는 것 같지 않아요?"
"그렇기엔 니 엉덩이가 정말 비정상적인 걸. 믿지 않을 수가 없지."
지민의 말에 민지는 일반인이 봐도 당연히 그렇게 느끼는구나 생각이 들어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었다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였다는 걸 깨닫고 지민에게 노트를 건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게 그 노트에요. 근데 저는 무슨 영문인지 죽을 힘을 다해도 열리지 않더라구요.."
민지의 말을 듣고 지민은 노트를 조심스레 받아들어 표지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봐도 그런 신비한 힘이 있다곤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평범한 노트였다.
"..진짜 안열리네. 이거 무슨 장치가 있는걸까?"
고작 노트를 펼치는데 이정도의 힘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힘을 준 지민은 작게 중얼거리며 노트를 바라보았다.
민지는 지민도 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심 실망하며 대답했다.
"몰라요. 여튼 이제 어쩌면 좋을지.."
"..태워버리자."
"네?"
지민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민지가 큰소리로 되물었다. 지민은 민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노트를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 노트를 펼치면 니 몸을 되돌릴 수 있겠지만 이 상태로 보아하니 우린 못 열꺼야. 그럼 차라리 거기서 더 나빠지지 않도록 태워버리고 삶을 사는게 어떨까?"
"아니 그건.."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잖아.'
민지는 지민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을 알고는 있었다.
노트를 태워버리면 지금까지 쌓여온 것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대신 더 나빠질 일도 없었다. 몸도 엉덩이만 빼면 돌아온 상태였고 엉덩이도 수술같은 걸로 축소하면 될 것 이였다 하지만..
"그치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학교에선 나를 뿡뿡이라 부르고, 내 주변 사람들의 인생이 망가져 버린 걸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구요!"
단순히 응 괜찮아 더 안 나빠지면 됐지 라고 하기엔 민지가 잃은 것이 너무나도 컸다.
자신을 사랑해주고 언제나 민지의 편이였던 엄마는 민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자신의 죄가 있다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먼저 밝히고 사과 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절친이던 혜윤은 민지를 세상에서 제일 증오하고 있었다.
또 다른 절친인 소민은 자신 때문에 인생이 나락으로 갈지도 모른다.
유나 선생님은 만삭의 임산부가 되어 그것이 진짜 자기 아기인 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나도 컸기에 민지는 쉽사리 노트를 포기 할 수 없던 것이다.
"고작해야 밑바닥 인생이던 년이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렸는데! 여기서 만족하라구요?! 안돼, 못해요. 싫어.. 행복했던 내 인생을 돌려달란 말야!"
민지는 그간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터지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지민은 그런 민지를 그저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 이였다.
"나는 네가 잃은 것들을 공감 할 순 없겠지만.. 하지만.."
지민은 조심스럽게 감정이 터진 민지를 위로 할 말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바스슥'
해가 뉘엿뉘엿 지는 골목길, 누군가가 모래를 짓밟는 소리를 내며 지민과 민지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왔다.
"..찾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감정이 북받쳐 울먹이던 민지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채 천천히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찾았어 최민지. 그리고 내 노트."
잔뜩 충혈된 눈으로 지혜가 민지와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뛴 탓에 전신은 땀 투성이였다.
"쟤가 걔니?"
지민은 민지에게 물어봤지만 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민 역시 누가봐도 저 얘가 노트의 주인이란 걸 알 수 있었지만 그저 확인 차 물어본 것 뿐이라서 민지가 대답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민지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니가 얘 인생 망친 주범이구나?"
"..넌 또 뭐야."
지금 당장 노트를 다시 쥘 생각 밖에 없었던 지혜는 갑자기 끼어든 지민을 보며 대뜸 반말로 말했다.
지민은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어깨를 가볍게 풀어주며 대답했다.
"뭐긴, 꼬인 인생 풀어주려고 하는거지. 선택해 민지야."
지민은 말을 마치곤 노트를 민지에게 건내주었다. 민지는 노트를 조심스레 받으며 방금 지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노트를 펼치면 니 몸을 되돌릴 수 있겠지만 이 상태로 보아하니 우린 못 열꺼야. 그럼 차라리 거기서 더 나빠지지 않도록 태워버리고 삶을 사는게 어떨까?'
태워야할까? 아니면 도망칠까?
본능적으로 노트를 김지혜가 손에 쥐게 해선 안된다는 걸 느끼며 민지는 고민하기 시작했다.